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미니즘 리부트 (문단 편집) === [[페미니즘]]으로 비평하기: [[일본군 위안부|위안부]]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법 === 본서는 6장에서 9장까지 저자의 대중매체 비평 논문을 4건 모아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페미니즘의 조망이 가장 두드러지게 반영된 것이 바로 9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내러티브|서사]]'''(narrative)'''를 대중이 소비하는 양상'''을 고찰하면서, 페미니즘 비평이 대중의 인기와 별개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탐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페미니즘 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매체들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먼저 국내 페미니즘 분야에서 기존에 논의되던 것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도 논란이 크게 발생한 것으로는 [[박유하]] 교수의 저 유명한 문제작 '''《[[제국의 위안부]]》''' 를 들 수 있다. 손희정(2016b)에 따르면, 해당 도서는 위안부 담론이 지나치게 [[민족주의]] [[운동권]] 진영의 영향력에 휘둘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에의 종속,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노동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사실 일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진짜 문제는 일본과 조선을 관통한 [[가부장제]]적 시스템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더라도 사회적으로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손희정(2016b)은 이런 논지가 매우 논쟁적이며 대중에게 비판을 심하게 받을 만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래도 위안부 담론에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는 의의'''는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해당 도서의 문제는, '''식민화라는 역사적 현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해당 도서에서 강변하는 것처럼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간호근로대원 등으로 지원했다고 치더라도, 식민지 여성의 입장에서 달리 어떤 선택권이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당 도서는 '''[[가부장제]]의 보편성을 강조하다가 [[일제강점기|식민지 기억]]의 특수성을 놓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위안부 논쟁과 관련하여 [[2016년]]에 개봉한 〈[[귀향(한국 영화)|귀향]]〉은, 그런 점에서 박유하 교수와 크게 대조되는 서사를 보인다. 이 영화는 [[박근혜 정부]]의 12.28 '불가역적 합의' 를 배경으로 하여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개봉하였으며, 최종적으로 300만이라는 상당한 흥행성적을 거둘 만큼 대중의 호평을 받았던 바 있다. 물론 해당 영화를 소개하는 [[귀향(한국 영화)|문서]]에서도 나오듯이, 평단에게는 썩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 손희정(2016b) 역시, 이 영화가 (조정래 감독의 말처럼) 비록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남성으로서의 참회" 라고는 하나,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는 그 서사와 재현이 '''"퇴행적"''' 이며 문제의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이쯤에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다룬 두 영화가 있다고 가정하고, 아래를 읽어보자. 물론 〈귀향〉 이라는 영화 자체가 꽤나 흥행했던 만큼, 해당 영화를 봤다면 둘 중 어느 쪽이 〈귀향〉 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란히 놓인 다른 하나는 손희정(2016b)이 비교의 차원에서 모범적 사례로 거론한 다른 위안부 서사이다. ||'''영화 A''' - 일본 군인들이 악마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며, 여성 주인공에게 만행을 저지른다. 개인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는 부재하며, 아버지와 오빠의 모습 역시 무능하게 그려진다. - 두들겨맞는 여성의 나신이 적나라한 구도로 화면에 담기고, 강간당하는 '처녀' 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린다. 등장하는 여성의 몸은 '유린당한 몸' 으로서 스크린에 가감없이 노출된다. - 위안부 피해자 여성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서로에 대한 끈끈한 자매애를 통해 의지를 잃지 않는다. 이들의 성취는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분위기로 그려진다. - 등장인물의 위대함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묘사된다: 여성A가 위안소를 성공적으로 탈출했으나, 뒤처져 있는 여성B를 위하여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위안소로 되돌아오는 장면 - 등장인물의 상처와 한은 위안부 소녀상, 천도굿, 평화의 나비라는 상징적 장치로 치유된다. 이는 국가의 부재와 무능한 남성 개인을 대체한다.|| ||'''영화 B''' - 일본인 개개인의 만행은 전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으며, 소학교, 군표, 국가보상금 등의 식민지 제도 및 사회가 유지되는 양상에 포커싱한다. - 직접적으로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포함하지 않으며, 그 대신 생존 여성의 일상적 고통과 한탄에 초점을 맞춘다. 즉, 등장 여성은 스스로가 '유린당한 몸' 이라고 여기지만, 카메라는 그녀를 유린당한 몸으로서 비추지 않는다. - 위안부 피해자 여성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당당히 재합류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의 성취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평범한 삶을 영위하려는 주체성으로 그려진다. - 등장인물의 위대함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묘사된다: 여성A가 입 안이 헐어 있는 여성B를 위해 귀한 월병을 꼭꼭 씹어서 나누어주는 장면 - 등장인물의 상처와 한은 생존 여성과 사망한 혼령이 서로 일상적으로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을 통해서 다루어진다.|| 손희정(2016b)이 9장에서 소개한 영화 줄거리 묘사에 따르면, 영화 A는 조정래 감독의 〈귀향〉 이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그다지 잘 쓴 서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함께 놓인 영화 B는 유보라 작가의 [[KBS]] 광복70주년 특집드라마 〈눈길〉 이다. 양쪽 모두 제작진이 여성의 역사적 고통에 대해 성찰하고 사죄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귀향〉 이 아닌 〈눈길〉 을 잘 만든 서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상단에서 소개한 《문화/과학》 제21회 북클럽에서, 저자는 〈[[아이 캔 스피크]]〉 를 또 다른 잘 만든 위안부 영화로 거론한 바 있다.] 먼저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어째서 〈귀향〉 이 문제가 많은 서사를 갖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영화는 "사실적 묘사" 라는 미명하에 '''[[강간]] 씬의 선정성을 극대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비단 손희정 외에도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강간]] 피해자나 [[성매매]] 여성, [[성노예]] 등의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는 달리 이는 '''절대로 필수적인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생존 여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성폭력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의 사회적 고립과 배척, 그리고 자신의 신세한탄에 있다. 〈귀향〉 은 이 점을 놓쳤고, 가히 [[포르노]]에 비견할 만한 강간 씬은 관객성을 남성으로 과잉젠더화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손희정(2016b)은 영화감독 미하엘 하네케(M.Haneke)를 인용하면서[* 하네케에 따르면, "폭력의 재현은 폭력 자체가 아닌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성적 페티시즘|페티시]]" 라는 표현과 "볼거리가 된 폭력" 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또한 〈귀향〉 은 그 고통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게으른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는 그 기억이 영매의 신접을 통해서만 소환된다는 타자화가 나타나는데, 손희정(2016b)은 그 결과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지금 여기' 를 살아가는 '''현실의 여성들과 유리되고 단절됨으로써,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평한다. 사실, 저자는 이런 서사적 "진부함" 이 일반 대중에게는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치유의 방식이고,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서사이기 때문에 채택되었으며, 그만큼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빈곤한 상상력'''에서 기원하며, 상상력의 빈곤은 관객들의 상상력마저 빈곤하게 하고, 담론을 망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영속화하는 유해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당초 저자가 《[[씨네21]]》 에서 비판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 그렇다면 〈눈길〉 은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어째서 잘 만든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이 특집드라마가 위안부 문제의 아픔을 조명하기 위해서 강간 그 자체가 아닌 '''여성의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고립감과 정신적 고통'''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앞서 비판했던 것과 같은 적나라하고 일견 [[관음증]]적이기까지 한 범죄 장면이 없다는 것. 게다가, 〈귀향〉 이 굿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그 고통을 죽은 사람의 기억으로 한정시킨 반면, 〈눈길〉 은 망자와 할머니들이 여전히 교류하고 공감함으로써 그것이 "지나간 기억" 이 아니라 '''여전히 이승에 상존하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임을 드러냈다. 또한 〈귀향〉 은 일본군 개개인의 악마적인 학대와 폭력을 힘주어 묘사한 반면, 〈눈길〉 은 개인이 겪은 문제가 일부 악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과 사회구조 차원의 문제 때문임을 암시했다.''' 저자가 이와 관련하여 극찬한 두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위안부 여성들이 공적 기록물을 남기기 위해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 겉으로만 그럴싸한 "간호근로대원" 자격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수물품(위안부 여성)의 처분" 을 담담히 논의하는 일본 군인들의 대화가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즉 창문의 프레임을 통해서, 이 일본군 개개인이 부도덕한 인물이 아니라, 그들을 가두고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 시스템 때문에 그들의 도덕성이 한계를 갖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들여다 보여지는 장면이라고 한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안부 여성들을 [[진혼곡]]으로 우리 사회에 소환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이 스스로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었음을 보여줄 것인가의 차이는 제작진의 상상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 은 이런 서사적 구조에 깊게 골몰하지 않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서사를 제시함으로서 대중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있었지만, 〈눈길〉 은 서사 수준에서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지금껏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서사를 새롭게 제시하는 열정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귀향〉 을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지의 저자의 비평은 《[[씨네21]]》 에서 적지 않은 반감과 반발을 불러왔고,[* 대중의 평가와 평단의 평가가 서로 크게 엇갈리는 국내 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디워]]》 및 《[[해운대(영화)|해운대]]》 등이 있다.] 특히 권명아(2016)는 "엘리트 의식에 빠진 지식인의 계몽주의적 사고가 아니냐" 고 강하게 비판했다. 영화평론가가 [[스노비즘|뭇 대중의 정동을 읽지 못한 채 자기만의 현학적 세계에 빠져서 '대중 혐오' 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권명아(2016)는 이와 관련하여 대중의 정동에 대해서 '부대낌' 이라는 표현을 동원했는데, 일반 대중이 이런 통속적인 위안부 영화를 보면서 '부대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자체로도 이 영화가 분명히 유의미한 가치를 갖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본서의 9장에서 손희정(2016b)은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평론이 일반 대중의 코드와 달라질 때 페미니즘 비평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손희정(2016b)에 따르면, 80년대에 관객성에 대한 연구와 페미니즘을 활용한 문화 연구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페미니즘 비평이 대중 정동과 괴리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서 저자는 두 가지를 들어서 재반론을 시도한다. 첫째로, 비평이 탐지하지 못하는 대중적 인기가 과연 비평에 있어 얼마나 유의미하겠느냐는 것이다. 둘째로, 대중적 인기가 크다고 해서 비평가들이 비판하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권명아(2016)가 지적했던 '뭇 대중의 부대끼는 정동' 에 대해서도 그것이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비평은 '''그와 별개로 제 몫을 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이 영화에 얽힌 비평의 역할은, 영화의 진부한 재현,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정동,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습관, 이 모든 것들을 '''회고적으로 되짚어보고 배움을 얻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의 표현을 일부 윤색하여 빌리자면, "영화 한 편으로 혁명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한 편만으로도 대중의 상상력을 망치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비평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한다. 《[[제국의 위안부]]》 의 [[박유하]] 교수 역시 그러했고, 권명아(2016) 역시 절대적인 주장은 되지 못한다. 특히 박유하 교수의 경우, 페미니즘의 관점은 언제나 무턱대고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이 늘 [[가부장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 비평은 가부장제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가 근대의 가부장제와 서로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따라서 무조건 가부장제만을 부각시키는 박유하 교수의 메시지는,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을 이용한 변명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페미니즘 비평이 '''여러 장의 조각보'''와 같아서, 개별적으로는 온전할 수 없고, 원래 서로 활발한 비평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실상 문예평론의 분야에서도 [[동료평가]]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